Комментарии:
영상 잘 보고 갑니다. 한-중 고대사 갈석산 논쟁 요점이 이번에 잘 정리되었습니다. 전문가는 역시 남다르네요.
Ответить관점만 달리하면 저 학자처럼 저리 잘 보이는데.... 병신들은 지금까지 쓸데없이 헤매기만 하다니.... 저거 따라하는 재야 애들 또 생기겠군!
Ответить기발하네~ 이야 천재네....
Ответить저 학자 눈에는 저렇게 쉬운 거였는데... 왜 우리에겐.... 아...
Ответить유씨 학자 저 사람에게는 너무나 잘 보이는데... 일부 바보들만 쓸데없이 헤매고... ㅎㅎ
Ответить역시 좀 다르네요!
Ответить그래서 진황도는 어디일까요? 친황다오
Ответить시민,재야사학 사이에 핫한 논쟁이져...
갈석보다 발해가 더 중요한듯
시민사학은 발해를 옛내륙호 대야택으로보고
재야는 보하이만을 보고있으니 서로위치 비정이 틀려서 논쟁입니다만
설문해자는 넓은강 호수도 해를 쓰기도해서
시민사학 주장도 틀린건 아닌듯여
이야 저놈봐라 신기하네.. ㅋ 저 <한서지리지 연지> 논쟁을 저렇게 간단하게 논파하다니....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 게...
Ответить쩝… 진짜 ‘발갈지간’ 수십년 논쟁을 저렇게 간단히 논파하다니— 감탄밖에는-
Ответить잠깐...
상주시대면 황하의 퇴적이 거의 진행되지 않아서 발해만이 현대보다 훨씬 컸잖아요?
바꿔말하면 지금 산해관보다 더 동쪽에 갈석산이 있었다면
천자기준으론 "발해 넘어에 갈석산이 있다" 로 보일수밖에 없잖아요.
그러니까 저 지리지 기록은...
고대 우리 한(韓)민족과 중국 민족의 경계로 인식되어 온 갈석산이 어디인가에 대해 지금도 논쟁이 많습니다. 현 하북성 진황도 갈석산, 아니면 현 보정시 등등. 여기에 대해 역사학자 유정희 선생과 인터뷰를 준비해 봤습니다. (참고로 발해(勃海/渤海)만은 본래 西漢시기 그 근방에 勃海郡(현 하북성 창저우 근방)을 설치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, 본래 '勃海'로 불렸으나 隋 煬帝 시기 渤海郡 설치 이후 '渤海'로 정착됨.)
Ответить이번에도 좋은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.^^
Ответить조조가 원소의 화북을 점령하고 갈석산에 서 시를 읊었고, 당태종이 요동성을 함락하고 시를 읊었는데 갈석산과 요수가 나온다 다 고쳐도 황제의 시는 못고친다
Ответить그러게... 해당 내용 갈석산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, 보고 난 후에도 관심은 없지만... 장담하건데 역사 관심가지고 볼 때, 거의 예외없이 거치는 실수는 ...역사 초짜는 거의 100%, 중짜 시절에도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에 하나가 오늘 날의 지도, 지리를 보고 옛날에 그런 것으로 착각하고 본다는 것. 일본 나라가 수도였던 시절엔 어째서 내륙인 나라가 수도였을까 하면... 당시엔 오사카가가 바다였었고, 배가 나라 앞 강에 바로 배를 댈 수 있을 정도로 교통이 편리했었고, 어째서 김해 금관가야가 해상 강국이었지 의문이 자연히 들면, 당시 금관가야국의 북쪽은 거대 호수 같은 강이 남쪽은 배가 닿는 항구였다는 것을...(지금은 김해평야인데..). 그러니, 역사부도를 고고학/과학에 근거해서 그 시대 그 시대를 재현해서 그려 넣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하면서도 쉽지는 않을 것 같아, 그런 자료가 희귀하니 아직도 알면서도 실수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많음.
Ответить다른건 잘몰겠고 아무튼 저 유씨 학자가 머리가 좋다는 건 인정!
Ответить김기홍의 역사퍼즐을 참고하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~
Ответить멋지네요! 또 이거 따라하는 학계+재야 애들 많이 생기겠군~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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